창원종친회 현수철 회장의 현덕윤 공 소개 글(자료)입니다.
延州玄氏 昌原宗會 창원 종중 상세계 (昌原 宗中 上世係) 350여년 前부터 代를 이어 전승된 비문탁본, 교지, 한성부, 동래부, 밀양부 호구단자, 사역원 입속문서, 부산 판찰소 발급문서, 당기, 첩(帖)등 조상(祖上)의 문적(文蹟)에 근거하여 상세계(上世係)를 기록 한다. 17세(十七世) 자헌대부 (自獻大夫) 諱(휘) 한일공(漢一公) 공의 휘(諱)는 한일 자는 汝冑(여주), 본관은 천녕(川寧) 고려 영동정 휘 守(수)의 후손이다 아버지 휘는 통정대부 철상(哲祥)이요 어머니는 광산김씨 휘 득해의 딸이다 공은 1625년 12월16일생이요 1724년 8월23일 졸 하였으니 향년 90이다 배(配)는 온양 방씨 신효의 딸과 후배(後配)는 평산 유씨 휘 박의 딸이다 公의 장지는 양주 별비곡 선조 묘역에 있으며 방향은 자오(子午) 방향의 언덕에 있는데 두부인과 합장 되었다 모두 정부인이시다 묘비명은 손자 태순공(泰純公)이 짖고 섰다. 공은 6남 7녀를 두었는데 덕문. 덕명. 덕윤(가선대부), 덕창(절충장군) 과 함계영, 강익문, 정진교(첨지)에게 시집 간 딸은 부인 방씨의 소생이다 덕화와 덕연(자헌대부이자 동지중추부사), 임흥동, 김덕항(무과) 이덕령, 이광국(첨사)에게 시집 간 딸은 후비 유씨의 소생이다. 公께서 사신 곳은 한성부 남부 훈도방 박정계 지금의 종로이고 3남 덕윤공께서 봉양하셨다. 公의 생신이나 행사가 있을때는 6남 7녀 자녀와 증손자 등 가족과 손님이 많이 모여 집의 크기나 재부 (財富) 정도를 가늠 할 수 있다. 公의 89세 생신때 한학 역관 위항 시인 홍세태公이 현덕윤 대인에 대한 축시(祝詩) 2편을 지었는데 여기 부기한다. 玄道以 大人 壽席作 (현도이 대인 수석작) 八十九世老 팔십구세노 여든 아홉 나이가 된 노인 이거니 人間無此筵 인간무차연 인간 세상에서 이런 전치 없다네 日回南陸外 일회남륙외 해는 남륙* 바깥에서 되 돌아오고 春逼北當前 춘핍북당전 봄은 북당*바로 앞에 가까이 왔네 祝食匊諸孫共 축희제손공 여러 손자 함께축수 술잔 올리니 留歡上客偏 유환상객편 상객에게 기쁜마음 유독 많구나 更須培楚樹 경수배초수 다시금 또 초나무를 잘 붇돋아서 天地興齋年 천지흥재년 저 천지와 나이 같길 기다리리라 *남륙:남방의 땅 가을이 가고 여름을 향해, 북당: 어머니 거처 어머니 상징. 다시금: 기다리리라 - 장수 축원 한다는 뜻 초나무 는 건강 장수 상징 玄道以 大人 晩詩(현도이 대인에 대한 만시) 去歲弧辰醉綺筵 거세호진취기연 지난해의 생신 잔치 자리에서 취했을때 看公鶴骨坐眞仙 간공학골좌진선 학골 지닌 공을 보니 진짜 신성 앉았었네 老星直照金樽裹 노성직조금준과 노인성이 곧장 금빛 술동이 속 비치었고 綵服交回玉樹前 채복교회옥수전 채복 입고 옥수들이 앞에서 춤을 추었네 五福元知三達德 오복원지삼달덕 오복 갖춰 본디 삼달덕을 지닌줄 알았고 九句方祝十添年 구구방축십첨년 구순 나이라서 열 살 더해지길 축원했네 遽然一夢聊乘化 거연일몽료승화 갑자스레 한번 꿈꿔 몸 죽어서 떠나가니 峨有長謠送上天 아유장요송상천 긴 노래를 내 지어서 상천에다 보내누나 *학골:학과 같이 바짝 마른 몸 수도자의 골상을 말한다 *노인성:사람의 수명을 주관하는 별자리 남극 노인성을 말한다 *채복---추었네 색동 옷을 입고 자녀들이 효성을 바친다 *옥수:휼륭한 자손을 비유 *오복:수(壽,) 부(富), 康寧(강녕),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삼달덕:지(智) 인(仁), 용(勇)을 말한다 18세 증 가의대부 한성부우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휘 덕윤공 (十八世 贈 嘉義大夫 漢城府府尹 兼 五衛都摠府 副摠管 휘 德潤公) 公의 휘(揮)는 덕윤이고 자는 도이 이며 금곡은 호이다. 1676년 3월29일생이고 1737년 8월10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61세이다 계비(繼妃) 유부인의 상을 당하여 매우 슬프하다가 치상의 슬픔을 못이겨 세상을 떠났다. 효심이 극진하였다. 공의 장지는 별비곡 선조 묘역에 모셨다. 배위는 昌原 황씨로 첨지를 지낸 만영의 따님이다. 公보다 12년 먼저 돌아 가셨고 貞夫人이시다. 婦德(부덕)이 있어 公을 잘 보우하셨다. 公은 3남을 두니 태벽 태익 태심이다. 태벽은 의과에 입격하여 전의 교수, 태익과 태심은 왜어 역과에 입격하여 첨정이다. 公은 1705년 증광별시 왜 역과에 입격하여 부산 훈도관(영사관) 훈도로 파견되여 일본과의 외교, 통상 등의 공무를 수행하면서 집무실 접견실 화장실 식당등이 헐고 낡아 108여채 건물을 크게 보수 함에 쌀 수백석을 홀로 부담하였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당상관의 품계를 내리고 재임하계 하였다. 왜관 10만평 경내에는 왜인 상인 500여명이 상주 하였는데 백성으로부터 쌀 수백석을 공출 받아 왜관에 보내는 악습도 일본 대표와 담판하여 그 폐단을 제거하였다. 이 공로로 종2품에 오르게 되고 서울로 귀임할 때 부산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우니 일찍 없는 일이였다. 1729년 여름 公이 집무실에서 혼자 앉아 10만평의 담장과 수백 채의 건물에 문창(門窓)을 모두 수리 하지 못해 한탄 하고 있는데 동래 범어사 승장 의준(意俊)께서 남한산성 석축때 동원된 많은 승려들에게 公이 배푼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전국 승려 1,000여명을 데려와 여러 달 큰 일을 도와 대역사(大役事)를 완성하였다. 公은 1730년 7월에 완성된 집무실 이름을 誠信堂(성신당)이라 명명하고 직접 휘호하여 편액을 걸은후 성신당기(誠信堂記)를 지었다. 성신당기 말미 일부분을 국역하여 여기에 부기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감격을 받은 일을 다 적을수 없다. 후에 이 집에 거처하는 사람은 서로 권면하여 나랏 일을 위하여 성(誠)을 다하고 사신을 맞이함에 모름지기 신(信)으로 하여 우리 상국相國(조선의 영의정 좌의정 총칭) 및 여러 노대인(관찰사 부사)의 성대한 뜻을 저버리지 말고 이어서 집을 이루며 이것을 썩지 않도록 한다면 다행이겠다.” “이 곳은 해뜨는 동쪽 일본과 경계에 있고 새로 지은 높은 누각은 거친 바다를 굽어보네 벼슬하는 보잘 것 없는 이몸, 몸은 비롯 늙었어도 交隣(교린)의 의리가 무척 무거우니 충심을 다 하리라 하늘은 구름과 비를 품고서 창망한 바다 밖에 있고 산은 봉래산과 영주산을 가르키며 보일 듯 말듯 하구나 지금은 다행히 좋은 시절 만나 경계 신호 없으니 태평가의 흥취를 백성들과 함께 누린다네” 公은 고결하고 우수한 인물이다 부산 사람들이 그를 흠모하고 추억하기 위해 4句(구) 16字(자)를 비석에 새겨 영주동 봉래초등학교 정문 앞에 세워 칭송 추모했다 頌德碑 (송덕비) (시민 단체에서 부산 용두산 공원에 재 건립 예정) 待人以誠 대인이성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는 성심을 다하고 接物以仁 접물이인 일에 대하여는 인을 가지고 하고 功大關防 공대관방 부산에 대한 공적은 크고 넓은 땅에 알려졌고 惠洽鄕民 혜흡향민 지역 주민들에게는 은혜를 베풀었다 公의 인물은 관대 후덕하고 법도가 있었다. 용모는 수염이 아름다웠고 목소리는 큰 쇠북과 같았다. 말씀을 들으면 본받을 만 하였고, 시에 능하고 초서, 예서 등 글씨가 탁월하였다. 성신(誠信) 외교를 주창 하시고 몸소 실천하여 일본 사람들을 감동 시키고 외교의 근본이 되어 조일(朝日) 간에는 200년간 평화를 유지 화평하였다. 2017년 10월 31일 세계 문화유산 유네스코에 조선통신사 현덕윤 관련 기록물 5점이 등재 되었다. 목록은 다음과 같다 (1)아메노모리호슈 성신당기(현덕윤의 성신당 편액을 보고 쓴 글) (2)아메노모리호슈 서장 (현덕윤이 보낸 시에 대한 차운) (3)현금곡 서장 (아메노모리 호슈에게 보낸 현덕윤 친필서신) (4)동해명구 東海名區 (일본 청견사 총문 현덕윤의 글씨) (5)조음각 潮音閣 (청견사 대장방 2층 현덕윤 글씨)
<자료1> 1726년 현덕윤이 아메노모리 호슈에게 보낸 간찰 
1726년 현덕윤이 아메노모리 호슈에게 보낸 간찰 번역문 "족하와 작별한지 10여 년인데도, 꿈속에서 때때로 바다 밖의 선산(先山)에 훌훌 다니나니, 이는 감흥이 가슴 속에 새겨진 소치에서 나온 것이나, 이미 족하의 좌우 에 이 몸이 갈 수가 없고, 또 서찰을 닦아 문안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마는, 쳐다보며 탄식하는 마음이야 조금인들 풀린 적이 있었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마는 족하께서도 똑 같은 회포를 가지셨는지요? 달포 전에 신재(信哉) 박영(朴令)에게 보 낸 서찰을 보았더니, 홍•현(洪玄) 두 군의 근황이 어떠한가' 하며 염려해주시는 내용 이 있는 것을 보고는, 후덕한 마음에 감사하여 실로 무어라 할 말을 모르겠습니다. 멀리 생각건대 늦더위에 족하의 생활이 편안하시시라 여겨져 구구하게 위안됨이 보통 사람보다 배로 더합니다. 저는 근년에 와서 우환과 사고가 이어져, 걱정이 병이되어 흰머리가 드문드문하니 이미 옛적의 현도이(玄道)가 아닌데다, 불행히도 재작년에 또 큰일(부친상)을 당하여 따라 가지 못하여 망극한 마음에 곧장 훌쩍 사라져 없어지고 싶을 따름입니다. 이제 조정에서 철물을 별무(특별 무역)하는 일을 여러 대신들이 어전 에서 확정하였는데, 불민한 저의 이런 심정을 무시하고 특별히 파견하여, 동래 왜관에 와서 칩거하여 7-8개월 동안 지체하고 있는데, 철물과 관련된 소식은 막막하게 들려오지 않습니다. 선고(先考)의 기일이 단지 한 달 남았는데, 조정에서는 일을 마치라고 재촉하는 명령이 앞뒤로 이어지고 있으나 돌아가려 해도 돌아가지 못한 채 심정만 더욱 극히 어지럽고 놀라우니, 스스로 가련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엎드려 생각건대 이런 때에 족하께서는 도노사마(태수, 대마도주)의 좌우에서 도리를 논하는 처지에 있으니, 혹여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을 위하여 곁에서 주선해 줄 방도가 있을까요? 두 나라가 성신(誠信)으로 교류하는 사이에 이 별무의 일을 속히 완수할 수 있다면 그 다행함 이 어떻겠습니까? 옛날 사람의 시에, “귀한 사람이 예전에 귀하지 않았을 때는, 모두들 한미한 사람 돌보아주기를 바라지만, 요직에 오르면서부터는, 언제 벼슬 않은 사람 사정 물은 적 있더냐?" 라고 하였는데, 족하께서야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다만 작별한지 이미 오래이고, 작위가 또한 높으시니 족하께서 나를 돌봐주는 의리가 예전에 비해 어떠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엎드려 웃습니다. 저는 4-5년 전에 홀몸이 되어 즐길 일이 없고 단지 창랑(홍세태) 시로(詩老)와 더불어 날마다 명산대천에 놀러 다니기를 일삼았는데, 오가는 사이에 또한 서투른 솜씨로 시를 주고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는 매우 어리석고 망령된 일이나, 지은 율시(律詩)와 절구(絶句)가 거의 수 백 수 에 이릅니다. 볼만한 격조는 없지만, 연전에 셋째 아드 님이 저의 사고(私稿) 한 편을 보고는 카쇼우에게 언급하였는데, 카쇼우 사백(詞伯)이 이제 셋째 아드님을 시켜 나의 시를 보고 싶다고 하니 도리어 극히 부끄럽습니다마는, 이 또한 나를 사랑하는 생각인지라, 그러므로 약 간의 율시와 절구를 치졸함을 잊고 베껴 올리오니, 카쇼우 족하에게 돌려 보여주셨다가, 그대로 보배로운 세 아드님의 서안 아래 놓아두시어, 저 도이가 비록 글은 못하지만 족하와 평소의 친분이 있으며, 옛 사람의 풍치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하십시오. 세 아드님은 탈이 없이 모두 성립하였는지요? 저의 둘째 아들, 이름을 태익(泰翼)이라 하고 자를 중거(仲擧)라 하는 자가 판사(判事)의 임무로 부산 왜관에 왕래한 지 이미 여러 해인데, 족하께서 이름을 기억하시고 마음에 두시어, 옛날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아들이 있음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저 또한 아들 셋이 있습니다. 제가 서울로 돌아가는 것은 분명 이달 그믐에 있을 터인데, 어느 때 동쪽 바닷가에서 다시 훌륭한 모습을 접하여 쌓아 회포의 만분의 일이나마 더듬어 보겠습니까? 창랑 사백은 이미 천고(千古)의 객이 되어버렸고, 수경(水鏡) 홍공(洪公)은 도 내간상(모친상)을 당하였으니, 알고 지내는 사람들 사이의 참담하고 가련한 심사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상복을 벗는 것은 초겨울에 있을 것이고, 공무로 인하여 내려오는 것은 내년 봄에 있을 듯하나, 주관하는 일을 마치기 전에는 결단코 이곳을 떠나기 어려운데, 인정으로나 예절로나 억제할 수 없는 사정에 구애되어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지만, 공무를 집행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극히 황송하여, 마땅히 혼미한 저의 아이를 내 대신 이곳에 머물게 해야 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이러한 사정과 바람을 자세히 헤아려서 비록 족하의 직분 내의 일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편의에 따라 선처하여 속히 좋은 소식을 내려주시어 이렇게 매달리는 소회를 위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래에 간략히 적은 물품으로 미미한 정성을 표하오니 웃으며 받아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종이를 임하여 서운한 생각이 많으나, 글로써 다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귀하께서 밝게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예를 갖추지 못합니다. 병오년(1726) 7월 일. 도이(道以) 현주부(玄主簿) (印) 별약과(別藥果) 100개 육포(肉脯) 20편. 끝.”
<자료2>
1711년 조선통신사 현덕윤(玄德潤)의 시에 차운한 아메노모리호슈의 奉次錦谷公見示韻(봉차금곡공견시운) 
殊方知己有玄公 수방지기유현공 妙譽會轟我日東 묘예회굉아일동 余事淋漓揮洒處 여사임리휘서처 銀鈎鐵畵晋時風 은구철화진시풍 「第二児文平 霞沼以同門之誼 養為螟蛉 托以奉祀 故姓本改為松浦 今非我子 而霞沼亦与吾兄有雞尊之約 則其為族下同也 只恐吾兄未知底理 謹此奉稟」 “출처” 奉次錦谷公見示韻, 雨森芳洲詩書 雨森芳洲 (正徳元年)墨蹟 一紙 1枚 33.3×44.0 紙本墨書詩題「奉次錦谷公見示韻」。正徳度上通事の玄徳潤の作に次韻。年代は通信使の渡来年,高月町立観音の里歴史民俗資料館所藏 ******************************************* 이역 조선의 친구인 玄德潤(錦谷)공이 있다. 당신의 명성은 이 일본에 까지 울려 퍼진다. 당신은 공무이외에도 실제로 본 일을 붓으로 휘두르니 그 필세는 중국진대의 서성 왕의지(王義之)(303~361)를 방불한다고 생각한다.“ 호슈는 나의 둘째아들 文平(호슈아들명,德之允)은 마쯔우라카쇼(松浦霞沼)의 양아들이 되었다. 왜냐하면 마쓰우라 카쇼와 나(아메노모리호슈)는 키노시타준안(木下順庵)하에서 같이 공부한 제자이다. 그러므로 文平의 가족이름은 나의 가족이름 아메노모리(雨森)에서 마쯔우라(松浦)로 바뀌었다. 그래서 문평은 정당하게 나의 아들이 아니며, 너(玄德潤)는 이런의미에서 친한 친구관계로 카쯔우라 카쇼와 끊을수 없는 관계이다. 너는 우리 그룹의 한 회원이다. 그러나 나(雨森芳洲)는 너(玄德潤)가 이 심오한 뜻을 진실로 이해 못할까 두렵다. * 역주: 信原修(노부하라오사무, 전 ,동지사여대교수)
 아메노모리호슈암
2013년 여름에 나카하마시의 다카쯔키쬬(高月町)방문하여 호슈암 내부전체를 찍은 것을 뒤지다가 봉차금곡공견시운(奉次錦谷公見示韻)이 보였다. 최근에 현덕윤을 공부하면서 현덕윤의 유물이 적은데 타인이 어떻게 표현한 것을 찾아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던 중 아메노모리호슈가 현덕윤의 시에 차운한 것을 자세히 보니 현덕윤에 대하여 다시 평가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1711년에 조선통신사로 상통사로 일본에 갔을 때 호슈를 만나서 시를 준 것에 호슈가 차운한 것이라고 하는데 제가 생각하기는 시기는 불명확한 것 같다. 왜냐하면 1711년 아메노모리호슈, 마쓰우라카쇼 그리고 현덕윤은 제8차 조선통신사때 처음으로 수개월 동행했지만 그 당시보다는 그 후 친해졌다고 보여진다. 1726년 친필서신을 보면 현덕윤은 많은 시를 마쓰우라카쇼(松浦霞沼)에게 보냈다고 했는데 아쉽게도 그 많은 시를 발견하고 있지 못하다. 봉차금곡공견시운(奉次錦谷公見示韻)은 雨森芳洲關係資料報告書(滋賀縣敎育委員會編集)에 있고 조선통신사 세계문화유산등재목록에도 있다. 사실 하급관리인 현덕윤이 이역 일본에서도 따뜻한 호감을 받고 있다는 사실과 대마도에 고용된 최고의 유학자이면서 1711년 조선통신사의 진문역(眞文役)이었던 아메노모리호슈와 마쓰우라카쇼와의 친밀함을 볼 때 종9품의 역관이었지만 학문과 인격은 중인계급으로써는 대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일본의 학자들은 조선의 힘은 중인계급이 있었기에 강했다고 하는 말도 이해가 된다. 상사인 동래부사 權府도 “부사 권부기(일명, 權府誠信堂記)”에서 “深得和悅於日方”라고 인정하고 있다. 즉 일본나라로부터 깊이 화평하고 기쁘게 함을 얻었다. 奉次錦谷公見示韻는 아메노모리호슈는 현덕윤이 보낸 詩(불행하게도 현재 존재하지는 않는다)에 대해서 답을 보낸 詩이다. 대마번의 유학자가 차운할때 과장으로 쓸 수도 있으나 현덕윤은 고결하고 우수한 인물인 것은 오랫동안 부산에 훈도로 성신당에 근무마치고 이임하니 그 주변의 사람들 조차도 그를 추억하여 “昭代風謠別集補遺”에 나타난 것같이 16문자를 비석에 새겨 그의 덕을 칭송했다고 한다고 하는데 훈도로써는 처음있는 일이라고 한다. 待人以誠 接物以人 功大關防 惠洽鄕民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는 성심을 다하여하고 일에 대하여는 인을 가지고 하고 부산에 대한 공적은 크고 넓은 땅에 알려졌고 지역 원주민들에게는 은혜를 베풀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시 사향(思鄕)을 통해서도 공무에 대한 그의 열정을 알 수 있다. 또한 현덕윤은 일본 淸水市(시미즈시) 의 淸見寺(세이겐지)에 있는 東海名區, 潮音閣현판의 글씨나 친필서신을 통해서도 그 당시의 아메노모리호슈가 진나라 왕의지의 필체와 버금간다고 할 정도로 주변사람들의 평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현덕윤은 오로지 왜관훈도로 파견되어 성신당 건축과 일본과의 교섭등을 하면서 한일 兩國誠信之間을 주창한 위인인데 오늘날 우리가 아메노모리호슈 이상의 평가를 못하고 현창하는 것이 없음을 아쉬워 한다. *주* 주1. 호슈의가계도 장남 : 顯之允(鵬海)1740년 41세로 사망 , 장손:連太郞(連), 차남 : 德之允(松浦霞沼 마쓰우라카쇼(1676~1728)의 양자)(이름은 文平,贊治) 3남 : 權之允(淸一,玄徹) 주2. 松浦霞沼 마쓰우라카쇼(1676~1728)(에도시대전기 유학자)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하에 수학하다。동문이 아메노모리호슈(雨森芳洲)의 추천으로 대마부중번에 봉사했다. 호슈와 함께 조선통신사의 응접에 대한 조선통교대기<朝鮮通交大紀>를 저술하다. 이름은 儀,允任(마사다다)。자는 禎卿。통칭은 儀右衛門。 저서는 「霞沼詩集」등이다. 호슈의 차남을 양자로 삼았다. 주3.松浦文平(松浦贊治 마쓰우라산지) 분류기사대강(分類紀事大綱)은 조선과 일본사이에 이루어졌던 복잡한 통교내용들을 항목별로 분류하여 1719년 대마번사 越常右衛門(코시 츠네에몽)이 대마번 가로 平田隼人(히라타하야토)의 지시를 받아 편찬한 책이다. 1634년부터 1838년까지 총7기로 나누어져 있으며 제2기<分類紀事大綱>은 1734년 대마번의 지시를 받아 松浦贊治(마츠우라 산지)가 편찬을 맡았으며 수록할 書狀의 발췌 및 수집부터 시작하여 6년 동안의 작업을 거쳐 1740년에 완성되었다。 文庫掛, 書翰吟味役,朝鮮方 佐役, 왜관의 一代官과 裁判으로서 부산에 파견된 적이 있다 1724년부터 1728년까지 4년 반 정도 長崎에 체류하는 동안에는 중국어 공부와 한문의 연마에 힘썼다。 그 후 雨森芳洲가 公作米年限 교섭 및 人參 구청 건 등 당시 조선과의 교섭현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1729년 3월 조선에 裁判(재판)으로 파견되었을 때는 松浦贊治도 학문연수의 명목으로 아버지를 따라 조선에 가서 1730년 10월 귀국할 때까지 1년 반 정도를 부산 왜관에 체재하였다.
<자료3> 세이켄지(청견사清見寺)총문-입구문_친필휘호 동해명구_일본의 동쪽에서 아름다운 곳_금곡거사 
<자료4> 세이켄지(청견사)대장방 2층의 건물상단 편액_바닷물소리가들리는누각_조음각 편액_금곡 
<자료5> 성신당기誠信堂記_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_현덕윤 성신당 편액을 보고 쓴 기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