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경대 전 국회의원이 말하는 현행 헌법
기자명박희윤 기자, 입력 2022.07.07 14:11
35주년을 맞는 현행 헌법의 개정 과정과 개헌
[시사매거진289호] 1987년 6·29선언 이후 진행된 제9차 개헌을 통해 국민의 열망이었던 대통령 선거 직선제가 실현된 이후 올해로 35주년이 되었다. 당시 여당인 민정당의 원내수석부총무이자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여당 간사와 국회 헌법개정안기초소위 위원장으로서 개헌 실무작업을 총괄한 현경대 전 국회의원은 “87년 당시의 개헌 정국 상황을 저는 혁명적 상황이었다고 본다”면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대다수 국민의 호응을 받을 수 있는 헌법 개정의 이슈를 만들어내는 게 불가능하다고 본다”면서 “개헌이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경대 전 국회의원
현행 헌법이 이전의 헌법과 다른 점이 있다면
현행 헌법은 1987년 제9차 개헌을 통해 제정된 헌법이다. 9차 개헌 이전의 헌법들을 살펴보면 여덟 번의 개헌이 집권자의 집권 연장을 위한 개헌이었거나 정치적 변혁에 따른 새로운 헌정질서의 구축을 위한 개헌들이었다. 전자의 예는 발췌 개헌이나 사사오입 개헌, 3선 개헌 등을 들 수 있고, 후자의 예로는 4·19 혁명 이후에 내각제 개헌, 5·16 이후의 제3공화국 헌법, 5·18 이후의 제5공화국 헌법 등을 들 수 있다. 반면 현행 헌법은 1987년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과 국민적인 요구가 받아들여져 여야 합의에 의해 개헌안이 만들어지고 국회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해서 확정된 헌법이다. 과거 개정 헌법의 경우 후유증이 심각하게 일어나서 정치적인 불안이 계속되었지만 9차 개헌은 제(諸)정파 간의 합의에 의해 개헌안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후유증이 없었다.
현행 헌법을 통해 한 번의 개헌도 없이 故 노태우 대통령부터 윤석열 대통령까지 선출했다. 결국 현행 헌법이 이렇게 수명이 긴 것은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헌법이었기 때문이며 그러한 점에서 현행 헌법의 의미를 부여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6.29선언 전까지 상황은 어떠했나
대통령 선출이 간선제였던 상황에서 야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계속 요구했었다. 12대 총선이 끝나고 나서 야권이 개헌을 상당히 거세게 요구했다. 그래서 여야 합의로 1986년에 현행 5공 헌법을 개정하기로 하고 어떻게 개정을 할 것이냐에 관한 논의를 위해 헌법 개정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당시 여당이던 민정당은 의원내각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야당인 신민당, 민한당, 국민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제출했다. 개헌 논의를 해야 하는데 국회 개헌특위 공청회 생중계와 관련해 야당이 시비를 걸더니 논의는 하지 않고 계속 장외 투쟁을 했다.
민정당은 의원내각제를 주장하고 야당은 대통령제를 주장했는데 각각의 셈법이 있었다. 먼저 민정당의 경우는 전두환 대통령이 의원내각제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었다. 또 정략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당시 야권에는 YS, DJ, JP 등 스타 대통령 후보들이 있었지만, 민정당에는 그런 후보가 없다는 약점이 있었다. 반면 전국의 정당 조직, 즉 읍·면·동의 책임자 뿐만 아니라 통 단위, 리 단위의 책임자까지 제대로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조직적인 면에서는 강점이 있었다. 전국 단위의 선거는 바람을 타지만 국회의원 선거구처럼 작은 선거구는 조직력에 의해서 어느 정도 성과를 낼 수 있다고 판단을 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정치판을 분석해 볼 때 의원내각제를 했을 때는 과반수를 하거나 과반수를 못 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제1당을 하는 데는 민정당이 자신이 있기 때문에 의원내각제를 주장했다.
야당은 YS나 DJ가 대통령에 대한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계속 대통령제를 주장한 것이다.
개헌 정국이 타결이 안 되고 야권에서는 계속 장외 투쟁만 하는 상황에서 야당이던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가 86년 12월 말에 ‘선(先)민주화 후(後)내각제 협상용의’를 발표했다. 소위 ‘이민우 파동’이라고 하는데 이 기자회견이 나오자마자 YS와 DJ가 즉각 반발했고, 이후 YS, DJ 계열의 신민당 의원 대거 탈당과 통일민주당 창당이 이어졌다. 85년 12대 국회가 처음 시작할 때는 제1야당이 신민당이었는데 87년 봄에는 통일민주당이 제1야당이 된다.
개헌에 대한 논의가 진전이 없이 계속 공전(空轉)되는 상황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4월 13일 호헌(護憲)조치를 발표한다. 86년 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고 88년 올림픽이 다가오는데, 평화적 정권 이양과 올림픽을 잘 치러야 선진국 대열로 진입할 수 있다는 목표가 있었다. 그래서 정치권이 너무 혼란스러워지면 올림픽을 제대로 치를 수 없기에 현행 헌법대로 이번 대선을 치르고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난 다음에 바로 개헌 논의를 하자라는 의미의 개헌 논의 중단 조치였다. 그러나 6월 10일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 후보가 결정되는 날, 서울시청 광장에서는 호헌조치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리고 결국 6.29선언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6.29선언 이후 개헌 논의는 어떠했나
6.29 선언 이후에는 야당과 싸울 일이 없었다. 7월 초에는 의원내각제가 아닌 당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준비했다. 이후 통일민주당과 여야 4:4의 비율로 구성된 8인 정치회담을 통해 협상을 시작했는데 당의 개헌안을 확정하는 작업을 하면서 권익현, 윤길중, 최영철, 이한동 의원을 협상팀으로 모셨다.
민정당의 개헌안과 야당들의 개헌안을 토대로 협상이 필요한 조항 110개를 만들었다. 일단 110개를 한 번에 함께 검토하자 했고, 이의 없이 합의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나올 수 있으니 우선 쉬운 것부터 합의하자고 제안했다. 첫날 절반 정도가 정리됐다. 7월 31일 첫 회의 이후 한 달만인 8월 31일, 헌법전문과 본문 130개 조항에 대한 완전한 여야 합의가 이루어졌다.
8월 말에 합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개헌안을 만들기 위한 헌법 개정 기초소위원회가 여야 5:5 동수로 만들어졌다. 당시 원내 수석부총무이자 개헌특위 간사를 맡고 있던 제가 기초소위 위원장으로서 개헌안 작성을 했다. 헌법의 큰 부분에서는 합의가 되었지만, 개헌안을 작성하는 과정에서도 밀고 당기고, 합의하고 협의해야 할 내용들이 있었다. 협의하는 과정이 약 3주 정도 소요되었고, 9월 17일 헌법개정안 초안이 완성되었다. 이후 국회의원 거의 전원의 서명을 받아 9월 18일 개헌안이 발의되었고 공고를 거쳐 10월 12일 국회 의결, 10월 27일 국민투표에서 총 유권자 78.2%의 투표와 투표자 93.1%의 절대적인 지지로 개헌안이 확정되어 12월 대통령을 직선제로 선출했다.
정치권의 개헌 논의에 대한 의견은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국회나 정부 쪽에서 개헌 문제를 이슈화하려고 하는데 결론적으로 쉽지 않다고 본다. 우선 개헌은 현재의 정치적 현실을 기초로 해서 미래의 프로그램을 짜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정치적 현실을 무시하고 개헌 문제를 논의할 수가 없다. 그래서 헌법을 만들거나 개정할 당시에 정치적 제(諸) 세력 간의 협상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협상의 결과가 아닌 어떤 주도 세력의 강압에 의해 만들어진 헌법은 반드시 후유증이 있다.
87년 당시의 개헌 정국 상황을 저는 혁명적 상황이었다고 본다. 유신 이후 대통령을 내 손으로 직접 뽑아야겠다는 국민적 열망이 워낙 컸었고, 6월 항쟁으로 국민의 의지가 표출됐다. 당시 집권세력이 그러한 국민의 의지를 받아서 6.29 선언으로, 즉 집권층인 이른바 호헌 세력과 개헌 세력이 어떤 의사의 합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정국이 급변하면서 개헌 정국으로 뒤바뀌어졌고, 그러한 상황 속이었기 때문에 개헌 작업이 원만하게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지선(至善), 지고(至高)의 법은 만들 수 없다. 개헌을 말하면서 구체적으로 현행 헌법에 어떤 것이 문제가 되니까 어떻게 바꿔야된다고 하는 구체적인 대안 제시도 없다. 대다수 국민의 호응을 받을 수 있는 헌법 개정의 이슈를 만들어내는 게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개헌이 이루어지기는 쉽지가 않다. 다만 일부 정치적 어려움을 타개를 위한 방안의 하나로 개헌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들이 있지만, 개헌까지 가기는 어렵다고 본다.
대통령의 4년 중임제를 주장하는 정치인도 있는데
제가 그 점에 관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다. 먼저 우리나라와 같은 정치 풍토에서 4년 중임제를 했을 때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87년 당시 개정안을 만들 때 많은 사람이 4년 중임제를 주장했고, 전 대통령에게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전 대통령은 ‘나는 표를 얻기 위한 대통령이 아니다. 내가 만약에 표를 얻어야 된다고 하면 지금 이러한 정치를 할 수가 있겠는가? 국민의 표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역사의 심판을 받겠다’고 말했다. 만약 중임제를 하게 되면 대통령 당선된 그 날부터 재선 선거운동을 해야 하는데, 과연 국정 운영이 제대로 되겠느냐 하는 것이 전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현재 우리 지방자치단체장들 보면 알 수 있다. 그 지역의 발전을 위한 장기적인 프로젝트보다는 재선이나 3선을 위해 무슨 일을 할 것인지에 관심이 가 있다. 더구나 우리나라처럼 직업공무원제가 제대로 확립이 안 돼 있고, 또 언론이나 국민의 비판 기능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그러한 체제에서 단임제는 의미가 없다고 본다. 다만 중요한 국가적 아젠다, 미래를 위한 장기적인 프로젝트들이 연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그런 체제가 만들어져야 한다.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지적에 대해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헌법대로 안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헌법대로 한다면 대한민국 대통령은 정말 힘든 대통령이다. 예를 들어 대통령 당선되고 난 후 일하기 위해 국무총리, 국무위원 임명을 해야 하는데 국무총리를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나? 국회 동의를 받아야 한다. 또 국무위원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나? 국무총리의 제청을 받아서 임명해야 한다. 그리고 국정의 중요 사안은 국무회의의 심의사항으로 되어 있다. 검찰총장, 육군 참모총장, 국립대학교 총장 등은 국무회의의 심의사항이다. 뿐만 아니라 국영기업체인 LH 사장, 관광공사 사장 등의 임명도 국무회의 심의사항이다. 하지만 문제는 전혀 헌법이 지켜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자격 없는 사람을 공기업의 사장으로 임명한다고 해도 국무위원 중에서 아무도 반대를 하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다.
공천 문제도 그렇다. 예전에는 집권당 총재, 즉 당 대표를 여당의 경우 대통령이 겸직했다. 예를 들어 노태우 대통령 겸 민주정의당 대표, YS도 마찬가지였다. 선관위에 제출하는 공천장은 당 대표 명의로 작성해야 했기 때문에 예전에는 국회의원 공천을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 결재를 받았다. 대통령이기 때문에 결재받은 게 아니라 당 대표이기 때문에 결재받은 것이다. 이후 당정 분리를 통해 대통령이 당 총재나 대표가 아니기 때문에 공천 결재를 받을 이유가 없다. 다만 당 소속 대통령의 경우에 협의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헌법에 규정된 대로 한다면 결코 우리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문화가 그렇게 만들고 있는 거다. 법에는 그렇게 제도적인 제어 장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작동을 안 하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하는 건 허상이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참모들의 책임이 상당히 크다. 국무총리나 장관들이 국무회의에서 올바른 발언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탈원전 정책에 대한 책임을 대통령 혼자 져야 하나? 아니다. 탈원전이 국가 정책으로 논의될 때 함께 동의했던 국무위원들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만일 국무위원들에게 대통령과 함께 연대 책임을 묻는다면 국무위원들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 후원회장으로서 근황은
후원회가 출범하고 바로 코로나-19로 인해 거의 활동을 하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어떻게 국가 경영을 했고, 어려운 시대에 어떤 국정철학을 가지고 정말 아무것도 없는 대한민국을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는가에 대해 국민에게 잘 홍보도 하고,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지혜를 모아보는 그러한 모임들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동안 거의 모임을 갖지 못했다. 또 국민 여러분 중에 박정희 대통령의 국정 전략을 고양하고, 홍보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실 분들이 많으신데, 아직 저희가 그런 분들을 모실 수 있는 활동도 거의 못 했다. 하지만 이제 코로나도 거의 종식이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이제부터 시작이다.
‘다시 박정희다’라는 표현을 즐겨한다는데
요즘 우리가 처한 남북관계 상황이라든가 동북아 정세, 세계적인 흐름을 보면서 때로는 현재의 모습과 과거 4·19 이후의 혼란상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점점 더 심해지는 계층·세대 간 차이, 특히 북한 문제를 둘러싼 이견(異見)들이 극과 극을 달리면서 심각한 갈등과 분열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4·19 이후의 혼란을 극복하고, 우리 국민의 의지와 열정을 하나로 모아 가난을 극복하고 선진국 대열로 들어설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다. 그런 박정희의 국정철학 방식이나 정신 등을 현대적인 의미로 재해석하고, 어려웠던 시절을 되돌아보며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다시 박정희다’라는 말을 강조한다.
하고 싶은 말
역사의 단절은 있을 수가 없다. 아무리 단절하려고 해도 단절이 될 수 없다. 국민이 분열하고 사회적인 갈등의 문제는 국가를 이끌어가는 지도층의 리더십 문제라고 본다. 코로나-19 이후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 국민의 열정과 역량을 하나로 결집할 수 있는 국가적 리더십이 더욱 필요한 상황이다.
IMF 때 ‘전국민 금 모으기 운동’을 기억한다. 어느 민족에게서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가? 나라가 어려울 때 결혼반지를 내놓을 수 있는 정도의 심성을 가진 국민이 어디에 있는가?
미국에는 각 지역마다 한인회가 구성되어 있다. 한인회에는 체육회가 있는데 미주 한인 체육회 주관으로 2년마다 약 6~7천 명이 모여 3박 4일 동안 체육대회를 진행한다. 미국에 이민 가서 사는 어느 민족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한인사회 내부를 들여다보면 항상 사이가 좋은 것만은 아니다. 서로 소송을 하고 다툼이 있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싸울 때 싸우더라도 체육대회는 함께 모여서 진행한다. 이런 민족이 어디 있는가? 이렇게 무서운 저력을 가진 민족이 바로 우리다. 정말 박정희 대통령을 능가하는 그런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나온다면 세계 일류 국가로 발전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본다. 그래서 미래를 이끌어 나갈 젊은 리더들이 이런 역사의 교훈과 현재의 문제를 잘 고민하고 올바른 성장을 통해 대한민국을 이끌어 나갈 동량(棟樑)으로 우뚝 서 주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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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윤 기자 bond003@sisamagazine.co.kr